1988년 베트남 중부, 그곳에는 초록 들판의 노란 꽃들이 있다. 아이들보다 훨씬 큰 키의 풀, 눈이 부실만큼의 투명한 바다, 바다를 따라 펼쳐진 절벽, 이곳 전부가 삶의 터전이자 놀이터인 아이들. 아이들 속에서 새로운 감정을 만나고 동생을 누구보다도 아끼면서도 뭔지 모를 그 ‘어떠함’을 느끼는 형.
사람이 새로운 감정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낼까. 무엇인지도 모를 무언가를 안고 우리는 어떠한 행동을 할까.
영화 속의 주인공은 구리를 금으로 착각한 뒤 비로소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화를 내며 뛰어갔고, 동생이 아끼던 두꺼비를 모른 척하기도 했으며 동생을 뒤에서 내려쳐 누워있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는 이내 미안해하고 눈물을 흘린다. 충동적인 우발성이라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결국에는 책 한 권으로, 그 속의 두 줄로, 모든 행동의 원인, 즉 감정적인 표출의 해소를 마주할 수 있었고 그렇게 영화를 본 나는 가벼워졌다.
감정. 감정을 느낀다. 사람이 감정을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다. 특히나 어릴수록 그렇다. 타인을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면 이미 수많은 감정으로 가득 찬 상태일 것이니까. 어린아이가 배가 고프다가 밥을 먹으면 포만감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진다. 반대로 배가 부른 상태에서 밥을 먹게 되면 불편함을 느낄 것이고. ‘좋다, 나쁘다.’ 라는 단순 명료함으로 표현하자면 나쁘다고 표현해도 무방하겠다. 아마 그 감정이, 기분이 좋지는 않을 테니까.
기본적인 의식주 활동으로 생활의 기본을 배워가고 그러면서 더 세부적으로는 감정이라는 것을 점차 알아간다. 곧이어 그것을 단어화하고 그렇게 인식하면서 계속해 살아간다. 감정의 정의란 반드시 한계가 있고, 사람들은 그저 서로의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들 사이에서 시소 놀이를 하며 왔다 갔다 하는 것일 수 있다. 특정한 단어로 정의된 감정을 내뱉을 때, 그 단어에 어떠한 수식어가 오냐에 따라 완벽하게 다른 무엇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완벽하게 내 어떠함을 전달할 수는 없다. 그냥, 그저 어떠함이기에.
만일, 지금까지 알고만 있다거나 스스로 느껴봤던 감정이 아닌 새로운 감정을 느낀다면. 무엇이 됐던 처음은 무섭다. 몰라서 무섭고, 몰랐던 것을 알게 돼서도 무섭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이 처음이라는 단어로 뇌리에 새겨지는 것 자체가 무섭다. 이미 많은 사람이 정의 내린 단어의 감정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자신의 ‘처음’은 혼돈을 이루게 한다. 새로운 감정으로 소중한 것이 망쳐지려 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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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여민주 칼럼니스트
사진, 부천판타스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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