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케의 아버지 톨루이는 징기스칸의 막내 아들이었으므로
초원의 관습대로라면 몽골초원과 가장 많은 재산 및 인원을 상속받은 톨루이가 대칸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몽골은 더 이상 목가적인 목동들의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천하의 주인 자리를 원시적인 관습에 따라 결정할 수는 없었고,
징기스칸의 유지 또한 쿠릴타이에서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말 많고 탈 많은 쿠릴타이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대단했던 대 두목 징기스칸도 결정하지 못한 일을 소두목들이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반적인 장자승계로 가자니 장자인 주치는 징기스칸의 친자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의 자식이었으며,
그나마 일찍 죽어 승계권이 그의 아들 바투에게 있었고,
초원의 관습을 따라 막내를 임명하자니 욕심 많고 힘센 다른 형제들이 반대하였다.
그렇다고 친자식들 중 맏이인 둘째를 선택하는 것도 명분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복잡한 삼차방정식을 전직 초원의 강도들이 쉽게 풀리는 만무하였는데,
만일 분열되면 천하에 깔린 원수들이 몽골을 회쳐먹으려고 들게 뻔하였으므로,
어떻게든 풀긴 풀어야 했다.
결국 이 도적놈들은 치열한 이합집산을 거쳐 조정자의 개념으로 오고타이를 선택하였는데,
대위를 움켜쥔 오고타이는 조정자에 만족하지 않았고, 대대손손 자기 새끼들이 대칸이 되기를
원하였다.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오고타이와 그 뒤를 이은 귀유크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펼치며 톨루이가를 박해하였고,
장자 주치의 아들인 바투와 대립하였다.
이 와중에 오고타이 계열은 많은 원수를 만들었고.
따라서 귀유크가 죽었을 때 그 동안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은 톨루이 울루스가 가장 세력이 약했으나,
여러 가지로 심경이 복잡한 바투와, 그동안 양산되었던 불만세력들의 지원에 힘입어,
톨루이의 장자 몽케가 대칸이 되었다.
몽케는 신변의 안전과 자파의 강화를 위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하였고, 그 결과 그 동안 밉상이었던
오고타이계가 거의 몰락하였는데,
속은 시원했겠지만,
징기스칸의 피를 이어 받은 황금씨족을 공개적으로 숙청하는 것은 금기였으므로 비판의 소지도 다분히 있었기에,
몽케는 이러한 비판을 잠재우고, 자신의 존재의미도 과시할 겸 동생 쿠빌라이에게 남송정벌을 하게
하였고, 그 밑 동생 홀라구에게는 중동 정벌을 지시하였다.
제일 이뻐했다는 막내 동생 아릭 부케는 데리고 있었고.
그런데 홀라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등 썩 일을 잘했으나, 쿠빌라이는
하는 짓이 영 미덥지 못했다.
딴마음을 품은 것 같기도 하고.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던 몽케는 결국 친정을 결심하였는데,
이참에 고려도 정리하고 싶었는지, 자랄타이를 고려 전담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후 자랄타이의 행보를 보면,
몽케는 금쪽같은 전사들을 소모하며, 이미 털을 대로 털어먹은 고려를 점령해서 영토화하기 보다는,
완전항복을 받은 후 빨대를 꼽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오고타이 부자도 못한 일을 했다는 명분도 짭짤했을 것이고.
개뿔도 없이 사기로 연명하는 고려에 최항을 대동하고 왕이 입조하라는 명령을 내린 몽케는
친히 남송을 향해 진군하였는데, 하필 이때 고려는 매국노 이 현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는 명백한 반몽골적 행위이었으므로 자랄타이는 1254년 늦여름,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6차 여몽전쟁이 시작었다.
이놈들은 김윤후의 충주성과, 처인성의 데자뷰, 홍지대사가 버틴 상주산성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쓸고 다니며 5개월 동안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였다.
포로만 20만이 넘었고 살상자는 셀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진행된 여몽전쟁 중 인명 손실이 가장 많은 전쟁이었다는데, 얼자 최 항은 그냥 강화도에 짱 박혀 있었다.
경상도 남부, 전라도까지 휩쓸던 이놈들은 1255년 1월 몽케의 명으로 철수하였는데,
예전처럼 거짓으로라도 항복을 받고 철수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종전이 아니라 휴식을 위한 휴전의 성격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