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 초의 동아시아는 격동 그 자체였다.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서로 치고 받느라 정신이 없었고,
당나라는 황소의 난 이후 주전충에게 나라를 빼앗겨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당나라에 눌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던 거란은,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영웅을 만나 무섭게 팽창하고 있었고.
천하를 뺑 둘러보아도 어디 한 군데 조용한 곳이 없는 그야말로 난세였다.
이 격동의 10세기 초에 즉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거란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끼고, 이웃한 여러 나라와 힘을 합쳐 거란을 막고자 하였으나,
하나같이 제 코가 석자라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20년 가까이 거란의 준동을 어찌어찌 막으며 버텨왔으나, 924년, 요동 전투의 승리를 끝으로 운이 다하였다.
925년 12월 21일,
거란은 지난 요동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20여 년 동안 아무리 두들겨도 꿈쩍도 않는 요동방어선은 내버려두고,
부여부를 직공하여 포위 3일 만에 함락시켰다.
당황한 왕은 주변을 닥닥 긁어모은 군사 3만을 노상에게 주어 거란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노상은 맥없이 패하며 왕의 마지막 밑천을 날려버렸고,
거란은 단숨에 수도, 상경용천부을 포위하였다.
왕은 백성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리고 결사항전 의지를 표명했으나, 백성들은 단체로 피난을 떠났고.
포위된 지 4일, 거란과 전투가 시작된 지 불과 15일 만인 926년 1월 14일,
왕과 300여 명의 신하들은 변변한 저항도 못해보고 야율아보기에게 무릎을 꿇었다.
야율아보기는 왕을 처음엔 정성껏 대접했으나,
성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고 발해가 다시 저항하자,
열 받은 야율아보기는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왕과 왕후를 거란 본토로 끌고 갔는데,
왕과 왕후에게 각각 지들 부부가 탄 말의 이름인 오로고와 아리지라고 부르며 모욕했다고 한다.
21년간의 재위였다.
융성했던 발해가 어째서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일까?
수도와 인접해있어서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높았던, 부여부의 함락이 패전의 결정적 이유라는데,
지리적 요건 상, 요동이 대당 요새라면 부여부는 대 거란 방어기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당이 맛이 간 상태였기 때문에 요동도 대 거란 방어 임무를 주로 수행했을 것인데,
왜 발해는 주력을 요동에만 모아두고 부여부의 방비를 그렇게 허술하게 했을까?
그리고 부여부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요동의 주력들은 뭘 하고 있었기에,
왕은 요동의 군사들을 움직이지 않고 수도의 병력을 빼어 노성에게 주었던 것일까?
또한 왕은 결사항전의지를 불태우고 성은 포위되었는데, 백성들은 어떻게 단체로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거란과 사전교감이 있던 유력자가 왕명을 거역하고 백성들을 빼돌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5경 62주를 자랑했던 발해였는데, 나머지 지역들은 수도가 함락되는 동안 뭐하고 있었을까?
15대 228년의 역사를 가진,
나름의 강국 발해가 이렇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한 이유로는,
대현석 왕 시기부터 이어온 귀족들의 권력다툼 및 분열, 흑수말갈을 비롯한 말갈 제 부족들의 반발,
백두산 화산 폭발 등의 자연재해, 민심이반 등이 거론되는데,
한,두가지 원인 때문이라기보다는 위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되어, 거란과의 싸움에 힘을 효과적으로 결집시키지 못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처럼 진을 다 빼고 끌만큼 끌다가 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잔존세력을 남겼는데,
이들 중 일부는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의 든든한 무력기반이 되었고, 통일 전쟁에 기여하였다.
이것이 고려가 발해를 흡수하였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으나,
대부분의 백성들과 다수의 세력들은 만주에 남았고, 고려와 관계없이 200년의 세월동안 줄기차게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일 이 시기에, 한반도에 통일된 세력이 있어서, 옛날 광개토대왕이 신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거란을 막아내고 발해를 보호국으로 삼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든다.
대인선 왕.
정신없는 시기에 왕 노릇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이 분명하나.
내치, 외치의 기록이 거의 없어 동정조차 받지 못하는 비운의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