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왕, 누가 작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시호에 대왕이 들어가는 마지막 왕인데,
이 양반도 족보가 불확실하다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이 삼 형제라는 설, 차대왕, 신대왕이 태조왕의 서자라는 설,
신대왕이 차대왕의 아들이라는 설 등등 별의 별 설이 다 있다.
차대왕처럼 폭삭 늙은 나이인 77세에 왕위에 올라 91세까지 재위했다고 하는데,
건국 시기 역사에 대한 조작과 윤색은 만국 공통이므로 그러려니 하자.
나이가 얼마든, 족보가 어떻게 되든 신대왕은 명신 명림답부에 의해 추대 되어 왕 노릇을 한,
어찌 보면 운 좋은 왕이었다.
휘는 백고, 차대왕 시절에는 산골에 숨어 살았고,
차대왕을 죽인 명림답부가 불러서 왕위에 올랐으며,
명림답부가 하자는 대로 하여, 무사히 왕 노릇을 마칠 수 있었다.
즉위 후 국상제를 도입하였고, 대사면령을 내리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168년에 현도태수에게 항복하였으며, 이듬해에 현도태수를 도와 부산적을 토벌하였다.
172년에 현도태수의 공격에 청야전술로 대응하였고. 지친 한군을 명림답부를 보내 크게 격파하였다.
179년 명림답부가 죽고 바로 따라 죽었다. 향년 91세
*명림답부
차대왕 시절 연나부 조의로 있다가, 165년(차대왕 20년) 쿠데타를 일으켜 신대왕을 옹립했다.
166년(신대왕 2년) 국상에 임명되었고, 패자 벼슬을 더해 내외 병마의 통수권과 함께 양맥부락에 대한 지배권을 받았다.
172년, 현도태수 경림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청야전술을 주장하였고,
한의 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크게 섬멸하였다. 이 공으로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받았다.
179년 9월 113세의 나이로 죽자 왕이 직접 애도를 표하고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 지냈다.
신대왕의 시대는 명림답부의 시대라고 할 만 한데, 이 양반도 나이가 황당하다.
기록대로라면,
99세에 쿠데타를 일으켜, 106세에 한군을 말 타고 추격하였으며 113세에 사망하였다는데,
100년 가까이 숨죽이고 있다가 100살 넘겨서 인생의 승부를 걸었다는 이야기이다.
말도 안 되고,
최소한 50은 빼야하지 않을까 싶다.
태조왕 즉위 이전의 50년이 누락되어 줄줄이 나이가 이렇게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청야전술
명림답부가 창안한 독보적인 전술은 아니고,
우리 민족이 국가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은 견벽청야라고도 부르는 전술로서,
적이 쳐들어오면 생활 터전을 파괴하고 산성에 틀어박혀 적이 물러갈 때까지 저항하는 방법이다.
적의 보급을 곤란하게 하여 스스로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므로,
쌀 한 톨도 남기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물까지 묻어버린다.
집도 파괴하고. 들판에서 익어가는 곡식도 싹 불태운다.
그리고 산성으로 피신하여 적이 공격해오면 저항하다가 요행히 물러가면 다시 돌아가는데,
살던 터전은 청야가 되어 버렸으므로 다시 집짓고 우물파고 해야 한다.
상당히 효과적이고 힘이 없으니 별 수 없이 사용하긴 해야 하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라고 세금을 내는데,
도리어 파괴를 하게 하는 국가의 책무를 저버린 아주 몹쓸 전술이기 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