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유서 깊은 향리 집안 출신으로,
무예와 용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일자무식의 다른 무신들과 다르게 천문에 취미가 있을 정도로
상당히 유식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경 진은 무신 정변에 적극 참여하여 평장사까지 지낸 인물이었는데,
뛰어난 자질과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어린 나이부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그는,
불과 21세에 친위군 대장인 견룡 행수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의 승진을 거쳐 정 4품 장군이 되었으며,
본향 청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사심관이 되었다.
사심관이 된 그는 대대로 물려오는 재산까지 국가에 헌납하는 등 상당한 의욕을 보였으나,
일처리가 집권세력의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얼마 안 되어 면직되고 말았다.
뛰어난 능력의 자존심 강한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파면된 25세의 경대승은 현 정권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 정권을 담당했던 송유인과 정 균이 여러 가지 실정을 거듭하며 조야의 인심을 잃자,
세상을 뒤집어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발칙한 정 균을 제거하기 위해 정의의 칼을 뽑자,
옛 부하들과 금군병사들은 기꺼이 수족이 되어 주었고,
팔불출이자 딸 바보인 명종은 소중한 공주가 정 균의 첩이 될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그에게
무한 감사와 함께 신뢰를 보여 주었다.
정 균을 제거한 후 송유인 등 정적이 되었거나 될 만한 자들을 모조리 도륙하였고,
그냥 두었어도 곧 죽을 나이인 정 중부를 기어이 찾아내어 저잣거리에 효수하였다.
마치 보현원 사건을 연상케 하는 이 사태에,
조정의 권신들은 예전의 문신들처럼, 반격할 생각은 못하고 전전긍긍하기만 하였으므로,
자칫 피 끓는 젊은이의 단순 테러로 끝날 수도 있었던 그의 의거는 본격적인 쿠데타가 되었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26세의 젊은이는 현 질서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고,
의종 살해에 대해 적개심을 표출하였다.
그러나 이는 주변 어른들의 기대에는 크게 어긋나는 짓으로서,
정중부 덕에 살맛나는 세상을 맞이했던 무신들은 분노하였고,
무신 정변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명종 또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그는 명종의 입각제의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지위를 포기하고, 동지이자 수족인 무술고수 100여명과 함께 자택으로 물러나 버렸다.
조정이나 군부에 막후 조종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임금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지금까지 시도 된 적이 없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하며,
고려 사회를 개혁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경대승은 도방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수족들을 비밀경찰처럼 운용하여, 반발세력들과 누가 보아도
죽어 마땅한 놈들을 때려잡았고,
조정에 수시로 출몰하여 집정의 권한을 행사하였는데,
심약한 명종은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하였고,
제 발 저린 데가 많은 권신들 또한 공연히 나서다 박살나는 수가 있으므로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이전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대를 받게 된 문신들은 오히려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므로,
그의 권력은 점점 강해졌고 도방은 초법적인 기관처럼 되어, 사회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도방은 공식적인 국가 기관이 아니었으므로,
그 구성원들은 국가로부터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하였는데,
일반적인 수장들과 달리,
경대승은 누대의 집안재산도 부정하게 모은 재산이라 하여 국가에 헌납할 정도로 축재에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가끔 명종이 상당한 하사품을 내려주었어도,
그의 식솔들을 포함한 수족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침실까지 숙소로 제공하고,
한 이불을 덮고 자기를 마다하지 않는 수장에게 손을 벌릴 수 없었던 도방의 인원들은,
그 동안의 비밀경찰 활동을 통해 반란의 위험이 있거나,
부정 축재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므로,
경대승의 묵인, 방조 하에 사회정화를 겸한 약탈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 동안 떵떵거리던 고위층들은 더욱 몸을 사리게 되었으나 일반 백성들은 환호하였다.
이리되자 고려의 정국은 더욱 도방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조정은 추인기관 비슷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던 중방은 무력하게 되었다.
중방은 현종 때부터 있었던 무신 협의체 기구로서 고위 무관들이 모여 한담이나 나누던
일종의 친목회 따위가 아니라,
비록 그 위상은 낮았으나,
무신들의 최고 의결기구로서 요즘으로 치면 합동참모본부와 비슷한 기관이었고,
정변 이후에는 계엄 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하던 권력의 중추였다 .
따라서 이의방이나 정중부 같은 당대의 집권자들은 중방을 장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그 권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방의 고위 무관들 도한 일정한 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를 바탕으로 집권자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중방은 당대 무인들에게는 자부심과도 같은 기관이었고, 정중부는 무신들의 세상을 만들어준
은인 같은 사람이었는데,
경대승은 정중부의 처단에 이어 중방까지 무력화시켰으므로, 이는 무신들에게 상실감과 분노를 동시에 안겨주는 폭거였을 것이다.
또한 중방의 권력에 의지하여 왕 자리를 유지하던 명종에게도 든든한 울타리가 무너졌다는 의미였을
것이고.
그러거나 말거나 경대승은 자신의 복고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철학과 현실적인 필요성에 따라,
죽일 놈들은 죽이고 박살낼 놈들은 박살내 버렸으므로,
그 서슬에 천하의 이의민도 고향인 경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명종은 명종대로 극도의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아마도 경대승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켰을 것이다.
신비와 공포를 적당히 혼합한 생소한 체제로 고려를 지배하던 경 대승은,
그 위세가 무색하게 30살을 갓 넘기고 병사하고 말았는데,
그 집권기간이 고작 4년이었고 후계자를 키울만한 나이도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의 새로운 체제의 핵심인 도방은 그의 원수들에 의해 박살나 버렸고, 구성원들이 거의 참살되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막나가던 무신정권에 물음표를 던지며, 투철한 신념으로 사회 정의를 위해 매진했으나,
아직 경륜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젊은 나이에 집권한데다, 그나마 요절하는 바람에 그 기간도 짧아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재산은 도방의 숙소로 사용하던 집 한 채와 쌀 몇 섬 그리고 약간의 말먹이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 역사상 드문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이상주의자였다.
명종은 혁명에 의해 추대된 허수아비 왕이었으므로,
무신 정권 초창기에는모든 권력이 예전의 문벌 귀족들을 대치한 중방에 있었다.
비록 집권자가 바뀐다 할지라도 이는 중방 내부에서 발생한 권력 투쟁의 결과일 뿐
왕의 역할이 바뀌지는 않았으므로,
명종이야, 나라가 산으로 가든 어디로 가든, 그저 한 목숨 보존하며 왕 자리에 앉아 있을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는데,
경대승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
지지 세력도 별반 없는 26살 젊은이의 준동은 ,
산전수전 다 겪은 중방 고관들의 눈에는, 혈기에 미쳐 날뛰는 중뿔난 망아지 정도의 가소로운 수준..은 아니었겠지만,
대단한 파괴력을 지닌 혁명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대승 또한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을 것이므로.
조정이나 중방을 장악하려는 노력 보다는 자신의 신변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여,
자택에 사병 집단인 도방을 설치하고 으르렁거렸으나,
우리에 묶인 것도 아니었으므로 자신에 대한 반발세력이 나타면 수시로 튀어나가 물어뜯었다.
또한 쿠데타의 주역인 금군의 병사들도 아직 궁궐에서 근무 중이었으므로,
임금은 일종의 볼모가 되어 자신의 친위군인 금군의 눈치를 봐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제 멋대로 정사를 농단하던 무리들은 몰살되었고.
따라서 당시의 정세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주체가 없는 묘한 상황이 된 것인데,
마치 호랑이가 사라진 산을 휘젓고 싶은 늑대들이, 파수견이 사나워 숨죽이고 있는 것과 유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대승을 제거하려 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도방의 장사들이 일당백의 워낙 뛰어난 무인들이라,
실행 족족 실패하였고 역습을 받기 일쑤였다.
살얼음판 같은 정국을 견디기 힘들었던 권신들은 결국 경대승을 집정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정치적 타협을 하였으나,
신변에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경대승은 여전히 자택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경대승은 세력이 미약한 집정이라는 한계 때문에 국정 전반을 장악하지는 못하였고 사정기관의 역할을 주로 하였으므로,
일상적인 정무를 보던 문신들은 오히려 자율성이 강화되고 결제라인이 단순해지는 등, 업무효율이
높아졌으나,
문자가 딸려 복잡한 서류 업무는 꿈도 못 꾸고,
가끔 서로 힘자랑이나 하며 주로 부정 축재와 권력 남용에 종사하던 중방의 고관들은
도방의 등쌀에 개점 휴업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자 정치의 중심은 자연스레 중방에서 조정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는 계엄이 해제되어 평시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도 가지는 것이어서,
명종에게는 왕권이 강화되고 임금의 권위가 회복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으나,
왕의 상황은 그렇게 편안하지 않았다.
임금의 명보다는 제 수장의 명을 더 무겁게 여기는 조폭들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명종은,
자기를 지켜주는 것인지 감시하는 것인지 모를 금군들에 늘상 둘러 싸여 있었으므로,
앞에서 굽실거리는 놈들의 주인을 생각하기에 바빴고,
자기의 허리를 꺾어 죽일 가능성이 있는 놈을 찾기 위해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형처럼 죽을 수 없었던 그는,
허리의 안녕을 위하여 경대승의 심기가 불편해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였고,
무슨 짓을 하던 토를 달지 않는 방법으로 경대승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었으며,
도방 체제의 안착을 도왔다.
따라서 젊은 나이에 자택에 고고하게 머물며 고려를 통치하는 경 대승은,
백성들에게는 신비로운 존재로 비쳤겠지만, 권신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도방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시스템으로 인해,
실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가 된 명종은,
잦은 숙청과 자연적인 노쇠로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혁명동지들이 하나 둘 자신의 곁을 떠나고,
경대승의 유일한 대항마라 할 수 있던 이의민마저 경주로 줄행랑을 치자,
찬바람 몰아치는 벌판에 홀로 남겨진 춘래불사춘의 심정이었을 것이나,
경대승에게는 임금을 어찌하겠다는 마음이 없었고, 왕실의 인척이 될 생각도 없었으므로,
그냥 저냥 왕 노릇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는데,
그 무섭던 경대승이 집권 4년 만에 어이없이 병사하자,
그 동안 그의 발걸음 소리에도 경기를 일으키던 명종은 난생 처음 임금처럼 호령하며,
도방의 인원들을 모조리 물고를 내버렸다.
감히 왕을 공포에 떨게 했던 괘씸한 자들에게 추상같은 군주의 위엄을 보인 것인데,
그러고 나서 보니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무식하게 힘만 쎈 권신들을 제어할 만한 세력이 주위에
없었다.
없던 친위세력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도 없고 사방에서 늑대소리는 들리고,
새로운 두려움에 휩싸인 명종은 별 수 없이 저 멀리 경주까지 도망가 나름 잘살고 있던,
힘 있는 혁명 동지 이의민을 불러들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명종이 어리석었다기 보다는 그가 살아온 세월이 그만큼 엄혹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