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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年 11 月 22日 9:06 下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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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설/칼럼고려 : 10대 정종, 거란에 판정승하다

고려 : 10대 정종, 거란에 판정승하다

왕 형
묘호의 발음이 3대왕과 같아 혼동이 되지만 한자도 다르고, 발음도 당시에는 구별이 되었을 것이다.
명이 짧아 20을 못 넘기고 요절한 친형의 뒤를 이어 17세라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1034년이었다.

사춘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형 못지않게 똑똑했기에, 열여섯에 시작한 형처럼 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는데, 그럴 수도 있지만,
당시의 정치 지형이 한 사람이 독주할 수 없는 집단 지도체제 비슷하게 되어 있어서,
전례도 있는데, 새삼스럽게  섭정을 이야기할 간 큰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고려는 3년 만에 또다시 어린아이가 옥좌에 오르는 얄궂은 상황이 되었고,
이로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들의 입지는 더할 수 없이 탄탄하게 되었지만,
짧은 기간에 연속해서 어린 아이가 왕위에 오르고 친정을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불안하였는데,
멋도 모르고 옥좌에 앉은 어린 왕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런데, 거란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섭정을 받던 흥종이 어머니를 쫒아내고 친정하는 일이 벌어졌다.
섭정해줄 어머니가 없어 불안에 떨며 어린나이에 친정을 해야했던 덕종 형제와, 어머니가 지나치게
표독스러워 넌더리를 낸 거란 흥종, 누가 더 괴로웠을까?

아무튼, 이로서 아들 대로 이어진 양국간 투쟁의 막이 올랐으나,
고려의 주적은 거란이었지만, 거란의 주적은 아무래도 북송이나 서하가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성종 사후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거란으로서는,
이들을 누르기에도 힘이 벅차 고려와 갈등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거란은 정종 즉위 이듬해에 사신을 보내어 그 동안의 적대관계 청산 및 예전 관계의 복원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현종 말년의 명목상의 주종 관계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이므로, 그다지 무리한 요구라고 할 수는
없었고,
고려 또한 연속된 어린 왕의 등극으로 그리 편안한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못이기는척 응해도 손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형처럼 거란 공포증이 없는 정종과 어린 왕을 돌보며 나라를 운영하는데 이골이 난 고려의 중신들은,
거란이 억류중인 고려 사신 6명의 송환과 압록강의 다리를 철거하기 전까지는 택도 없다며 거부하였고,
서북로에 성을 쌓으며 으르렁거렸다.

덕종에 이어 그 동생에게 또 한 번 망신당한 꼴이 된 흥종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뜬금없이 수군을 동원하여 압록강 유역에서 무력시위를 하였으나,
당대 최강이라는 궁기병 수십만의 침략에도 당당히 맞섰던 고려에게 그 정도로는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아버지 때와 달리,
말을 들어먹지 않는 서하, 북송 등과 치고 받기에도 바빠, 시급히 배후를 안정시켜야 했던 흥종은,
도대체 굴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고려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배 몇 척으로 뭘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고,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 열 받은 고려가 고토회복이라도 외치고 몰려나오면 대책이 없으므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고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강화를 체결하였다.

​대를 이은 투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정종은 어느덧 성인이 되었는데,
비록 거란과의 관계는 복원되었으나 언제 또 생트집을 잡고 집적댈지 모르므로,
형이 거의 완성했던 천리장성을 마무리하는 등 국방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지진,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덮칠 때는 반찬 수를 줄이는 등 백성들의 고달픔을 외면하지 않았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예송논쟁을 이끄는 등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였으며,
예학관련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
생존을 위협하던 내외의 갈등이  사라지고 이제 좀 먹고 살만 해졌으니, 예의를 좀 차리고 질서 있게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타자와의 관계 설정을 의미하는 예의는 사람 사는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인권의 개념이 없던 시대에 관계란 힘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의는 강자의 입맛에 맞게 구성되어 그들의 기득권 유지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유학의 ‘예’는 ​망해 버린 주나라를 모형으로 하는 복고적인 것이므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고,
종종 반동적인 경향을 띠게 되기 쉬웠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갈데없는 중세인인 정종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고,
혼란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질서 있고 조화로운 시대로 나아가가게 하는 것이 그의 시대적 소명이기도 하였으므로,
영명하였으나 시대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그는 나름의  이상사회를 제시하는 유학의 ‘예’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노비종모법을 제정하여 대대로 노비들의 한을 만들었고,
5역·5천·불충·불효한 자와 향 ·부곡인 ·악공 ·잡류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여 신분의 경직화에 기여하였으며,
장자상속과 적서의 구별을 법으로 제정하여 유교적 가부장권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보수적인 법안들로 사회는 안정되었고 고려는 평온의 시기로 진입하였으나,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는 오히려 악화된 면이 많았다.
결국 거란과의 오랜 투쟁을 통해 명과 실을 함께 갖추게 된 문벌 귀족들만 살판나게 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거란과의 대를 이은 투쟁을 마무리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며,
전성기를 이어간 정종은,
형보다  10년 더 산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중병이 들었는데,
자식들이 어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형제애가 남다른 집안이라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형처럼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서거하였다.
명군이었다.

​왜들 그렇게 서둘러서 가는지 원.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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