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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설/칼럼고려 : 거란의 2차 침입, 최악의 몽진

고려 : 거란의 2차 침입, 최악의 몽진

제 2 차 여요전쟁

거란은  1차 여요전쟁으로 배후를 안정시킨 후 초원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송을 윽박질러 전연의 맹을 맺고 연운 16주를 완전한 영토로 만들었다.
그런데 거란이 천하의 패권을 잡아가는 동안 고려는,
사련에 빠져 자신의 불가능한 꿈에 올인한 천추태후와,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에 빠져 정사를 내팽개친 목종이 연일 써대는 저질 막장 드라마로 영일이 없었다.

1009년 거란 성종의 어머니 소태후가 죽었다.​
소태후는 천추태후와 유사점이 많은 여인이었다.
우선 죽은 남편의 묘호가 경종으로 같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며,
아들의 치세 초반 섭정을 하며 내연남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였고,
정치적 야심이 강해 아들이 장성한 이후에도 정치의 전면에서 활약하였으며,
외교에 출중한 능력이 있었고 효자 아들을 둔 것까지 닮은꼴이었다.
그리고 두 여인의 치세 이후에 양국이 각각 전성기에 진입한 것 또한 공교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소태후는 자신의 뛰어난 업적뿐만 아니라, 아들이 명군 소리를 듣는 덕분에 후세까지 불세출의 여걸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반면,
천추태후는 강 조의 쿠데타로 몰락하였기에,
대부분의 업적은 묻히고 구설, 악행 그리고 아들 목종의 난행 등이 부각되어, 
자식과 나라를 망친 악녀가 되어 버렸다는 아쉬움이 있다.

위대했던 만큼 엄격했던 어머니가 사망하여, 본격적인 단독 치세를 시작한 거란 성종에게,
비슷한 성격의 어머니를 둔 고려 목종이 신하에게 시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종은 크게 분노하였고 징치를 결심하였다고 하는데,
현대의 관점이라면, 힘 좀 있다고 중뿔난 내정간섭이나 해대는 성질 더러운 폭군쯤으로 간주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당시의 거란은 송의 조공을 받을 정도의 패권국이었고, 명목상 고려의 종주국이었으므로,
제후국에서 발생한 패륜을 묵과하기 곤란한 점이 있기는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왕은 완전한 외번 신하가 아니라 형식에 불과한 제후였으므로,
내정의 문제를 외교적 수단을 비롯한 간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국력을 총동원하여 직접 침략을 한다는 것 또한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외교와 협상의 달인이었던 어머니 소태후에게 서른 살 너머까지 시달렸으며,
나중에 거란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성종이,
감정에 치우쳐, 앞뒤 재지 않고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리는 없으므로,
뭔가 복잡한 사정이 저간에 깔려있었을 것이다.

거란은 소태후의 활약으로, 전연의 맹을 맺고 국경을 확정하여 송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였으나,
이는, 더 이상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 또한 막혔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어머니의 그늘에서 막 벗어난 30대 중반의 능력 있는 군주 성종이,
마지막 미결정지라 할 수 있는 한반도 쪽을 주목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1차 여요전쟁에서 군신 관계를 맺기로 했던 고려는,
개국 이래의 적대정책을 고수하며 친송 기조를 바꾸지 않았고,
거란의 턱 밑에 강동 6주라는 난공불락의 요새지대를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래 그곳에 살고 있던 발해의 후예 여진에게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발해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거란의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가연성 물질이 즐비한 양국 사이에 불씨를 던진 것은 여진이었다.

고려가 영토로 편입한 지역은, 원래는 여진의 땅이었으므로,
원주민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이 불만의 땅에 철벽의 요새지대를 설치한 서 희의 업적이 놀랍긴 하지만,
모두가 그런 식견과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므로 언제라도 갈등이 표면화될 수 있었는데,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자, 혁명 정부 특유의 과격함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력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진부락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고려군을 이끌었던 하공진은,
패전을 만회한답시고 고려에 조회하기 위해 내부해 있던 여진 추장 일행을 학살하는 정신나간 짓을
저질렀고,
이에 열 받은 여진이 거란에 복수를 청원하는 와중에 강 조의 정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으므로, 거란은 2차 침입의 중요한 명분을 얻은 것이고,
이에 협조한 여진은 복수도 하고 서식지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1010년  11월, 거란 성종이 기세도 등등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말 타고 활 쏠줄 아는 놈들은 거의 다 끌고 왔는지, 거란에서 동원한 인원만 40만, 
여기에 원한에 사무친 여진의 병력이 추가 되었다고 한다.
하늘을 대신하여 흐트러진 천하의 공도를 바로잡는 거창한​ 무대의 막이 오른 것인데,
​이 무대의 고려 쪽 첫 등장 인물인 양 규는 거란의 하늘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군이 도착하기만 해도 천하가 앙복할 것이라 기대해마지 않았을 거란 성종은 감히 천군을 몰라보는 소국의 촌뜨기가 어이없고 답답했을 것이나,
어리석은 백성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도 천자의 도리이므로,​ 양 규에게 천하의 넓음과 천자의 위엄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직접 대군을 휘몰아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머쓱하게도 흥화진은 난공불락의 강동6주라는 명성에 걸맞게 7주야가 지나도록 요지부동이었고,
천명을 받은 대국의 천자는 첫 싸움부터 한 줌도 안 돼 보이는 요새 앞에서 애들하고 툭탁거리는 한심한 신세가 되었다.
이 꼴로 세월만 보내다가는 천자의 위엄이고 나발이고 다 물 건너간 형국이 되기 십상이므로,
난처해진 성종은 무로대에  20만을 남겨 무엄한 홍화진을 고립시킨 후, 
고려의 주력이 머무르고 있는 통주로 남하하였다.

당시 통주에는 독재자 강 조가 고려 전역에서 긁어모은 30만 대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약 20만으로 추정되는 거란군이 몰려들자 성을 나와, 당당하게 진을 펼치고 대적하였다.
병력 수도 더 많고, 전장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었으므로 나름 타당한 결정이라고 우길 수 있었을 것이다.
초반에는 대기병 장비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교과서적인 진이 위력을 발휘하여 제갈공명처럼 승리할 수 있었으므로,
강조를 비롯한 고려군 수뇌부는 적의 전투력이 소문보다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였고,
조조의 팔문금쇄진을 능가하는 자신들의 위대한 진을 이용하여 적을 궤멸시킬 꿈에 부풀었으나,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거란의 파상 공세는 야전의 경험이 별로 없었던 고려군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강력한 것이었다.
결국 기병의 돌파에 이은 후미차단 그리고 각개격파라는 고색창연한 수법에 알면서도 당하고 말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장기(or 바둑)를 두며 여유를 부리던, 강 조를 위시한 수뇌부 전원이 포로가 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기병들에게 포위된 고려 병사들은 자기 목숨은 지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통주성으로 가는 퇴로는 이미 차단되었으므로, 
곽주를 향해 열린, 유일한 탈출로를 이용하여 도망치기 시작하였으나,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보병은 기병의 손쉬운 먹이에 불과하였고, 완함령에서​ 곽주군에게 구원될 때까지 3만이 넘는 고려군이 학살당하고 말았다.
반면 통주성의 주민들은 눈앞에서 30만 대군이 궤멸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였으나,
고려군의 등뼈라 할 수 있는 중랑장들이 궐기하여 주민들과 함께 성을 지켜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고려로서는 기적 같은 일이었으나, 대국의 천자는 기가 찼을 것이다.

30만이나 되는 주력을 박살냈는데도 떨어질 생각을 안하는 통주성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리던 천자는 별 수 없이 고려의 패잔병들이 도망친 곽주로 말머리를 돌렸다.
홍화진에 이어 통주까지 패스할 수밖에 없었던 거란은, 체면도 체면이지만, 보급문제가 심각해졌다.
거란군은 전원 기병이고 보급을 담당하는 부대가 따로 있어서, 보급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한계가 있었고,
워낙 대병이다 보니 계속 길바닥에서 보급을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속사정이 있는 거란은 곽주성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들었고, 
이들의 사나운 기세에, 방어사 나리는 기겁하여 한밤중에 도망가 버리는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였으나,
완함령의 영웅 신영한을 비롯한 나머지 무장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며
고려 무인의 기개를 선 보였다.
그러나 눈물겨운 분전에도 불구하고 현격한 전력의 열세는 극복하기 힘들었는지, 통주성에 이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결국 대부분의 무장들이 전사하면서, 강동 6주의 요새 중 유일하게 함락되는 비운을 맛보고야 말았다.
어쨌든 고려에 침입한 이래 처음으로 근거지를 마련하게 된 거란의 하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서경을 향해 진군할 수 있게 되었다.

서경, 옛 고구려의 수도이자 현 북한의 수도.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땅인데,
당시에도 북방 최대의 도시이자 군사적 거점으로서 다물의 비원이 깃든 고려의 제 2수도였다.
서경이 지닌 군사적, 정치적 의미가 막중하였으므로,
고려 조정은 시간을 끌기 위해 거짓 항복을 하는 한편 동북면 주둔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고,
명령을 받은 탁사정과 지채문은 즉시 서경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서경의 수뇌부는 곽주가 함락된 지 3일 만에 거란이 서경 인근으로 육박해 들어오자,
하는 일 없이 자리만 높은 놈들이 늘 그러하듯이, 
신속하게 자체적으로 항복을 결정하고 항복 문서를 거란으로 보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지채문은 분기탱천하여, 즉시 항복 사절을 추격하여 살해하고 항복문서를 불태웠으나,
이와 관계없이, 대국의 천자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듯한 고려 조정의 거짓 항복을 믿고,
제멋대로 서경 유수를 새로 임명하는 등 접수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지채문은 뒤 이어 도착한 탁사정의 대군과 합세하여 서경의 혼란을 진압하였는데,
바로 다음 날 서경을 접수하기 위한 거란의 선발대가 도착하였다.
탁사정의 새로운 서경군은 멋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는 이넘들을 몽땅 도륙하였고,
이러한 상황 반전이 있는지도 모르고 유유자적 뒤 따르던 신임 유수의 본대마저 몰살시켜버렸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난 탁 사정에 의해 서경이 구원된 셈이었는데,
만일 탁사정이 단 하루만이라도 늦게 도착하였다면, 거란이 서경을 접수했을 공산이 크고, 
그랬더라면 ​이후의 전쟁 양상 또한 크게 달라졌을 것이므로, 
우리 입장에서는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농락당한 꼴이 된 거란 하늘의 아들은 크게 노하였고, 총공격을 명하였다.
분노한 거란의 공격은 당연히 거칠었으나,
서경의 구원자 탁사정은 마치 여포처럼,
안에서 방어만 하기 보다는 성을 나가 요격하기 위하여 주력을 이끌고 서쪽문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군.민 모두 기대에 차서 주시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인간이 성문을 나가자마자 무엇을 보았는지,
거란군 방향이 아닌 남쪽을 향해 돌진하였고 그길로 도주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신출귀몰한 작전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하던 거란군은 이내 별 것이 없음을 알았고,
탁사정을 비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작하였는데,
덕분에 양동작전을 위해 동문으로 나갔던 대도수만 집중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고 말았다.
1차 침입 때에 소손녕을 혼내 주었던 ​발해 왕자 출신의 맹장이,
별 이상한 인간 때문에 망국의 원수 거란에 포로가 되었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탁 사정, 이놈의 뇌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하루 만에 지휘부와 주력군이 증발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한 서경의 백성들은 패닉상태가 되었으나,
다행히 강민첨 등 중간급 간부들이 정신을 차리고 분전하여 간신히 함락을 막을 수 있었다.
통주에 이어 고려군의 허리가 위력을 발휘한 쾌거였고, 고려에게 주어진​ 또 한 번의 천운이라 할 수 있었으나,
닭 쫒던 개꼴이 된 거란의 천자는 고려의 하늘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한편, 여전히 거란 하늘의 의지에는 별 관심이 없던 흥화진의 양규는, 항복하라는 대국 천자의 지엄한 명령을 가볍게 묵살하고,
정예라고는 하나 단 700 기에 불과한 병력을 이끌고 곽주를 탈환하는 기염을 토하였으며, 통주까지 작전구역을 넓혀 나갔다.
양 규가 이 난리를 치는데도 무로대에 남았다는 20만은 찍 소리도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넘들은 전사들이 아니거나 일차 침입 때처럼 허풍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징기스칸도 전투병력이 20만을 넘지 못했고, 대륙을 집어삼킨 청도 20만 정도였는데, 거란 주제에​ 40만은 아무리 봐도 무리이다.
40만이든 20만이든, 서경 함락에 실패하고,
고려 내 유일한 근거지인 곽주마저 상실한 거란의 하늘은 울고 싶었을 것이다. 

​분통이야 터지지겠지만, 이러한 상황 전개는 거란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제 정신이 박힌 최고 지도자라면 철군을 심각히 고려하거나, 아니더라도 최소한 확전을 막고 협상을
시작했어야 하지만,
엄마의 치마폭에서 놓여난 지 얼마 안 되는 이 젊은이의 뇌 구조는, 아직 그러한 냉철한 판단을 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하였는지,
서경을 방치한 채 개경을 향하여 남하하라는, 열받은 감정을 따르는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딴에는 저항이 심한 곳을 우회하여 적의 종심을 타격하는 유목민 군대의 유서 깊은 전략을 택한 것이었는데,
그러기엔 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있었다.

이 꼴을 본 고려의 조정은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 하였으며,
전쟁에 별 도움도 안 되면서 괜히 어정대다 포로라도 되면 아주, 매우, 많이 골치 아파지는, 
아직 어리버리한 미래의 명군 현종을 개경에서 치워버리기로 하였다.
군사적으로는 상대의 무리를 응징하는 타당한 전략이었으나,
멋도 모르고 왕위에 올랐던 현종에게는 고생문이 활짝 열린 결정이었다.
여러가지 전략적 실패를 거듭했지만 기동력 하나는 아직 쓸 만한 거란군은, 지들 천자의 명이 떨어지자 바로 개경으로 쇄도해 들어왔으므로,
현종은 화급하게 개경을 떠나야 하였고, 미래의 위인 강감찬 각하도 일단 지 목숨부터 챙겨야 했다.
어리버리한 왕과 그의 왕비들은 서경에서 활약했던 중랑장 지채문을 비롯한 약 50여 명으로 수행단을 꾸릴 수밖에 없었고,
이 초라한 행렬이, 나름 고생했다는 선조의 몽진과는 비교도 안되는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몽진
주연배우들이 되었다.

새해를 3일 남긴 한겨울의 추운 밤, 미래의 명군 현종은 지채문의 호위 하에 개경을 출발하였다.
밤새 걸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음 날 경기도 연천 지역의 단조역에 도착하였는데,
먹을 것도 주고 바꿔 탈 말도 준비해주어야 할 역졸들이 단체로 미쳤는지, 임금님을 향해 활을 쏘며 덤벼들었다.
이 비적으로 돌변한 역졸들은, 역전의 용사 지채문이 활약하여 물리칠 수 있었으나,
완전 진압할 능력도 겨를도 없었으므로 일단 남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창화현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번엔 웬 고을 향리 한 놈이 나타나 이죽거리며 조롱을 하더니, 밤에 습격을 해오는 기가 막힌 일이 발생하였다.
이 공격에 측근, 환관, 궁녀 할 것 없이 죄다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임신한 왕후를 비롯한 몇 명만 남게 되었었는데,
다행히 지채문이 고군분투하여 겨우 창화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구사일생하여 한숨 돌리고 있던 무늬만 임금인 현종 앞에, 이번엔 치사하게 여진의 추장들을 살해하여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죄로 귀양을 갔던 하공진이 나타났는데,
반란을 일으켰다는 풍문과는 다르게 하공진은 그동안 반성을 많이 하였는지, 불안해하는 임금 일행을 안심시킨 후 사신을 자청하였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현종은 하공진을 보낸 후 남쪽으로 도주를 계속하였는데,
임금의 표문을 가지고 사신의 자격으로 북쪽으로 향하던 하 공진은 얼마 가지 않아 거란군의 선봉을
만나게 되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하공진은 그놈들을 설득하여, 추격을 멈추고 개경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는데,
만일 이때 사신이 가지 않았거나, 
갔더라도 거란의 선봉이 사신의 말을 듣지 않고 추적을 계속하였더라면,
불과 십수 리 앞에 있었던 현종은 속절없이 포로가 되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휘종이 포로가 되었던 송나라 꼴이 나거나, 그도 아니면 발해 꼴이 되었을 것이다.
하 공진이 나타났던 하루, 참으로 긴박하였다.
거란 하늘의 아들은, 
고려왕이 이미 남쪽 수 천리 밖으로 달아났다는 하 공진의 말에 속아, 왕을 잡아 전황을 뒤집기는 글렀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유목민 종자들의 관습대로 3일간 개경을 약탈한 다음 철수하였다.
지놈들이야 관행이었겠지만, 새해 벽두부터 겁탈당한 개경 백성들은 이가 갈렸을 것이다 .

현종은 병 주고 약 준 하공진 덕분에 기사회생하였으나, 
당시에는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지 당연히 몰랐으므로 무조건 남쪽으로 내달렸는데, 
길은 여전히 평탄하지 않았다.
안성에 도착했을 때는 수행하던 유종이라는 놈이, 지 고향이라고 멋대로 왕의 말안장을 뜯어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하였고,
천안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최측근을 자처하던 김응인과 유종이 행렬에서 이탈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이 지경이 되면 왕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이 올만도 한데,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한 현종은 꿋꿋하게 도주를 계속하였다.
왕은 공주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으나, 전황이 어찌되어 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으므로,
일단 임신한 마누라만 친정으로 가게 한 후 바로 남쪽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건 왕 생각이었고,
이번에는 대접도 못 받고 이어지는 강행군에 열 받은 호송 병사들이 종군거부를 일으켰다.
종군거부는 반역에 준하는 중죄이므로 성질대로 한다면 바로 참형으로 다스려야 마땅할 것이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채문의 권유대로 벼슬을 올려주는 것으로 무마하고,
길을 재촉하여 전주 땅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는 전주 절도사가 습격을 해왔다.
이놈이 왜 습격을 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아주 나쁜 놈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좀 모자란 놈이었는지,
현종 일행에게 인질로 잡혔고, 이놈을 방패삼아 전주지역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개경을 탈출한지 보름 만에 나주에 입성하였고,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태조에게 행운의 땅이었던 나주는 그 후손인 현종에게도 행운을 주었는지,
나주에 머문 지 3일 만에 거란이 개경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충분한 휴식과 지원을 얻은 현종은 드디어 제대로 된 임금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왕의 첫 걸음은 전주로 향하였고, 며칠 전의 싸가지 없던 놈들을 물고를 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7일간 머무르며 관제개혁을 단행하여 강조의 권력기반이었던 중대성을 폐지하고 중추원을 복원시켰다.
다음엔 공주로 행차하여  6일간 머물렀는데,
김은부의 딸 둘을 왕비로 맞이하여, 몽진 길에 유일하게 왕 대접을 해주었던 그의 호의에 보답하였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왕의 귀환이었다.​

한편 하공진에게 속아 , 또 닭 쫒던 개꼴이 된 거란 하늘의 아들은 별 소득도 없이 철군을 시작하였는데, 전략적 실패는 가혹한 대가를 요구하였다.
거란의 하늘에는 항상 , 언제나 , 늘 관심이 없던 양규를 비롯한 고려의 무인들은,
대국의 천자를 복날 나돌아 다니는 떠돌이 개새끼 취급을 하여, 뒤통수, 앞 통수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양 규는 귀주별장 김숙흥과 함께 무노대, 여리참, 애전 등지에서 크고 작은 7차례의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였는데,
이들의 등쌀에 거란은 강동6주의 다른 성들은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본국으로 회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규를 비롯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고려의 영웅들은,
풀죽은 강아지 마냥 꼬리를 내리고 철수하는 거란의 주력에게 마지막까지 달려들었고,
가열차게 공격하다가 마침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하마터면 주력이 몰살당할 뻔 했던 거란의 하늘은 뒤도 안돌아보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고.
양 규, 이 순신 못지않은 민족의 위인이었다.

​2차 침입으로 거란은, 엄청난 물자소모는 물론이고,
끌고 갔던 전사들이 너무 많이 죽는 바람에 관원의 수가 부족해질 정도의 피해를 입으며,
명목뿐인 고려의 항복과, 고려와 송의 연합저지라는 1차 침입 때의 성과를 재확인 하였고,
고려는 양 규 등의 활약으로 영토를 보전할 수는 있었으나, 
서북지방과 개경이 초토화되었고, 엄청난 인명과 물자가 소모되었다.
결국 거란과 고려 양쪽 모두 소득도 없이 피만 흘린 꼴이었으므로,
만일 소태후가 살아있었다면, 명군 아들이고 나발이고 회초리를 들고 날뛰었을 것이다.
한편 이 싸움에서 조연을 담당했던 여진은,
닭 쫒는 개의 뒤만 따라다니다 고래 싸움에 끼인 형국이 되었고,
삶의 터전이 난장판이 되는 바람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중 고려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은 천민이 되어 대대손손 조상의 잘못된 선택을 한탄하게 되었다 .

거란의  2 차 침입,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은 미완의 전쟁이지만,
굳이 위안을 찾자면, 현종이라는 불세출의 명군을 탄생시키는 데 밑거름이 된 전쟁이었다.
….정도가 아닐까?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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