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조영.
발해의 창업군주로서,
우리 역사에 고구려, 고조선을 제공하고 만주를 영원한 정신적 영토로 만들어 준,
고마운 민족의 영웅이나, 그 흔한 탄생설화는 고사하고 출신조차 모호한 신비의 인물이다.
중국 기록에는 발해말갈, 속말말갈, 고구려 별종 등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고 싶으나 그러기엔 나이가 좀 걸린다.
출생연도는 모르고 사망연도만 719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구려 구장이라면, 고구려 멸망 후 51년을 더 살았다는 뜻이다.
도대체 몇 살에 장군이 되었을까?
그 시대 평균 연령을 생각해 보면, 그냥 고구려 구장의 아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인데,
그럼 아버지에서 걸린다.
아버지는 걸걸중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걸걸중상은 고구려의 구장은 고사하고 아들보다 알려진 게 더 없다. 대씨도 아니고.
구당서에는 아예 기록조차 존재하지도 않아서, 가공의 인물이라는 의심까지 받는 사람인데,
아무튼 걸걸중상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고구려의 별종으로 영주지방에 살던 중, 이진충이 난을 일으키자,
걸사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루하를 경계로 성을 쌓아 지켰고,
측천무후가 진국공에 봉해 회유하였다.
그런데 걸걸중상이 바로 병사하는 바람에 유야무야 되었고, 아들 대조영이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다` 정도이다.
나중에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후, 처음에 국호를 진국으로 정한 것으로 보아,
걸걸중상이 아버지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정보가 너무 없다.
걸걸중상과 함께 걸사비우도 허국공에 봉해졌으나 거부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구려 유민은 강경 평민파와, 온건 귀족파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걸걸중상은 병사하였고 걸사비우는 거부하였으므로 측천무후는 진압을 결심하였고,
한바탕 전투가 불가피해졌는데,
이해고와의 일차 전투까지 고구려 유민의 주도권은,
온건파를 물려받은 젊은 대조영 보다는 생존한 평민 강경파 걸사비우에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걸사비우가 싸움에 대패하며 전사하자,
대조영이 패잔병들을 수습하였고 유일한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다행히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를 꺾을 수 있었다.
대조영이 용맹하고 용병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이로써 유민들에 대한 확고한 지도력을 갖추게 된 대조영은 그 후 더 동진하여,
옛 계루부가 있던 자리,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인 동모산에 터전을 잡았고,
700년경에 나라를 세웠다.
698년에 도망친 이래 단 3년 만에 나라의 기틀을 잡은 대단한 일인데, 기록이 전무하다.
나라 이름은 처음에는 진국이라고 했지만 외부적으로는 그냥 말갈이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만주는 싸잡아서 말갈의 땅으로 불렸던 것 같다.
건국 후 돌궐과 교류하면서 주변 지역을 장악해 나갔는데, 구체적인 세력 범위는 알 수는 없으나,
일단 압록강, 두만강 유역과 북만주 일부는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영토가 사방 2000리에 가구가 10여만 호, 강군이 수만 명이었고,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해북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는데,
문화나 산물은 거란, 고구려와 다를 바 없었다 한다.
측천무후 사후 부활한 당과 외교관계를 맺고 713년 발해군왕으로 책봉을 받았으며,
그 이후 발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신라는 발해가 당을 막아주는 방파제로 등장하였으므로 나쁠 것이 없었고,
발해는 대동강 이남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서로 소 닭 보듯 하였다.
신라는 고왕에게 대아찬의 관등을 수여하였다고 하는데,
대아찬은 장관급으로 진골 대접을 한 것이지만, 17관등 중 5등급이었다.
받는 기분이 어땠을까?
21년간 통치하며 발해를 만주의 강국으로 키웠는데.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무덤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