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승영, 신덕왕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917년 왕위에 올랐으나,
나라꼴은 박씨들이 다스리던 초기 신라 시절보다도 못하였다.
대야성이 버텨주고 있었기에 나라를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왕명은 경주 인근에만 겨우 미칠 뿐이었고, 재정은 매우 궁핍하였으며 병력도 보잘 것 없는,
초기 신생 도시국가 수준의 비참한 지경이었다.
이 꼴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김현승이 김씨의 복위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골통은 어찌어찌 때려잡았으나 당연히 나라는 더 엉망이 되었다.
현실 파악이 안 되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신라가 망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해매고 있을 때 주변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918년 왕건이 궁예를 주살하며 고려를 건국하였고,
집권 4년차인 920년에는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의 목숨 줄을 끊어 버렸다.
이 후 견훤과 왕건은 안동과 합천 지역에서 지들끼리 치고받았는데,
원주인인 신라는 안마당을 내주고 멀거니 구경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지경이 되니 신라는 누군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 동안 원한이 쌓일 대로 쌓인 견훤보다는 고려를 선택하였다.
광개토대왕시기로 되돌아간 셈이다.
5년에는 말갈족을 물리쳤다는데…얘들은 무슨 말갈일까?
아무튼 과거 삼국시대 초창기의 완벽한 복원이라 할 수 있었다.
7년에는 후당에 조공하였고, 조공 간 사신이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그 동안 반 독립적으로 할거 하고 있던 경상도 지역의 군소 세력들은 고려에 연이어 항복하였고,
망조를 상징하듯 벽화의 개가 울고, 뜰로 튀어 나오고, 활 줄이 끊어지고…
온갖 해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더 이상 신라가 재기할 방법은 없었다.
이 양반은 924년 사망했는데,
7년간의 재위였고 아들이 8명이나 있었는데도,
애들이 나이가 어려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시대상황에서 오래 살아봐야 별 영화를 보기 어려웠을 것이니 큰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경명왕의 아들들은 왕위를 잇지는 못했지만, 밀양을 비롯한 우리나라 박씨들의 시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