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경휘, 아들이 없었다는 아달라 이사금의 직계 후손이라 한다. 모계일 것이다.
헌강왕의 사위였으므로 효공왕의 자형이고,
여동생이 효공왕의 비였으므로 효공왕의 처남이 되기도 한다.
효공왕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선왕의 처남이자 자형의 신분이므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할 것은 없으나,
그래도 성씨가 바뀌는 일이었으므로 평상시라면 어림없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가 얼마나 정신없는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매제이자 처남인 효공왕의 뒤를 이어 912년 즉위하였는데,
즉위하자마자 아버지를 추존하고, 아들을 왕태자로 삼는 등
무려 728년 만에 복귀한 박씨 왕조의 정통성을 세웠다.
얼마나 조상님들께 떳떳하고 자랑스러웠을까?
그러나 이렇게 되찾은 신라는 예전처럼 활력에 넘치던 신라가 아니었다.
자연 재해는 연이어 덮쳤고
3년째인 914년에는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바꾸는 등 북쪽에서 으르렁거렸으며,
견훤도 예전의 백제처럼 신라를 부단히 괴롭혔다.
4년에는 국가 주요하천인 참포에서 강물과 바닷물이 3일간이나 싸웠다는데,
백두산 폭발로 인한 쓰나미가 아니었을까?
5년에는 견훤이 또 대야성을 공격해왔으나 용케 막아내었고.
이듬해인 917년에 사망하였다.
박씨 중흥 시조의 치세치고는 너무나 초라하지만,
어쩌랴, 당시 시대가 그러했던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