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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설/칼럼신라 : 52대 효공왕

신라 : 52대 효공왕

김 요, 헌강왕의 서자이다.

일찍이 헌강왕이 사냥 길에서 한 자색이 빼어난 여자를 만났는데,
그 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헌강왕의 유일한 아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사통의 결과이므로 헌강왕은 본부인의 눈치를 본 것 같으나,
고모인 진성여왕이 인지하여 태자로 봉했고 왕위까지 물려 주었다.
진성여왕이 말년에, 나라는 엉망이고, 몸에 병은 들고 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선위하였다….는데,
이미 태자이니 숨어있는 자도 아니고, 불과 15살짜리가 어질면 얼마나 어질었겠는가?
그냥 수사일 뿐이고, 다만 진성여왕 삼남매의 사이가 각별하였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겠다.

897년 고모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너무 어린 나이라 섭정을 받아야 했는데,
엄혹한 시대 상황은 왕의 어린 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서,
즉위 이듬해에 궁예가 한주와 삭주의 성을 대거 빼앗고, 송악군에 창업의 깃발을 꼽으면서 후삼국시대가 만개하기 시작하였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할 일은 해야 하기에 3년차에 박씨 처자에게 장가를 갔는데,
왕이 장가를 가든, 누가 시집을 오든 천하는 자기 시간표대로 굴러가는지라,
궁예가 전 주인 양길과 싸워 이겼고 그에 따라 주변 군현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5년차인 901년 드디어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900년에 세워진 후백제와 더불어, 삼국시대를 완전히 재현하였다.

후고구려는 옛날 고구려의 위용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옛날처럼 신라를 압박했고,
견훤의 후백제도 옛날 백제처럼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신라도 옛날처럼 대야성은 지켜내었고. 이에 자신감이 좀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이도 됐고 해서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20대 초반 젊은이의 의욕은 천하의 대세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해서,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백관을 설치하였으며, 패강진의 군현들을 복속시키는 등 나라의 틀을 잡아갔고,
9년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 후 죽령 동북쪽의 공격을 시작으로 신라를 본격적으로 두들기기 시작하였는데,
신라의 국력으로는 감히 맞서 싸울 수 없어, 그저 수비만 하라는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참한 와중에도 자연 재해는 끊이지 않아, 거의 매년 가물었고, 혜성이 나타나는 가하면,
시도 때도 없이 서리가 내리고, 우박에.. 대책이 없었다.
신라야 밥을 먹든 죽을 먹든, 궁예와 견훤의 싸움은 점입가경을 달렸고,
14년차인 910년에는 궁예가 왕건을 시켜 견훤의 나주성을 빼앗았다.

이렇게 궁예와 견훤이 천하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동안, 원주인인 신라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29살 먹은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더욱 없었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이 여자요 술이었으니 향락으로 빠져들었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대신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왕의 첩을 죽여 버리고,
정신 좀 차리라고 야단을 친 모양이나,
이미 망가진 심신은 화복되질 못하였고, 이듬해인 912년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15년, 향년 30세였다.

효공왕 이후는 박씨가 왕위에 오르게 되어 박씨의 권토중래가 실현 되었는데,
복귀가 너무 늦은 감이 있으나 그래도 완전히 밀려난 석씨에 비해 끊임없이 옥좌 주변에서 맴돌았던 박씨의 저력이 놀랍다.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김씨이긴 하나 견훤의 괴뢰 정부였으므로,
효공왕이 원성왕계 왕통의 마지막이면서, 사실상 김씨의 마지막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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