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응렴, 자살한 희강왕의 손자이다.
아버지 김계명은 문성왕 시기에 정권의 실세였는데,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다 늙은 헌안왕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문성왕을 협박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뭐가 되었든 경문왕은 861년 15세 ( 또는 19세 )에 즉위하였고 상대등 김 안이 섭정하였다.
김 안은 문성왕의 아들로 4년 전에는 어리다 하여 왕위도 물려받지 못했는데, 그 새 성장하여 상대등이 되었고 섭정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것만이 아니다.
헌안왕은 김균정의 아들이고 김계명은 희강왕의 아들이므로 서로 원수 사이인데,
아무리 적의 적은 친구라지만 김계명이 헌안왕을 도왔다는 것도 이해가 쉽지 않고,
헌안왕이 합당한 계승권자인 문성왕의 아들을 제쳐 놓고,
왕위를 원수 집안 출신인 계명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왕위를 빼앗긴 꼴이 된 김 안이 경문왕의 섭정을 했다는 것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진행들은 당시 정치의 난맥상을 압축적으로 나타낸다 하겠다.
이듬해에는 섭정이 김정으로 바뀌었고 신궁에 제사 지내었다.
이 또한 뭔가 복잡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3년에 국학에 행차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 동안 눈치만 봤는데 이제 자신감이 좀 생긴 듯하고.
4년에는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것으로 보아,
그 동안 잠잠하던 왜구들이 난리를 치기 시작했나 보다.
5년에는 당의 책봉을 받았고 친정을 시작하였다.
6년에 황룡사에 행차하고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등 본격적인 왕권강화에 나선 듯하나,
귀족들의 저항도 본격화되어, 이찬 윤흥 형제가 모반하다 발각되어 멸족되는 등 뒤숭숭하였다.
다음 해에는 임해전을 중수하는 등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역병에 홍수에 기근까지, 되는 일이 없었다.
8년에도 정신 없는 와중에 귀족들의 반란이 또 일어나 이찬 김예와 김현을 처형하였다.
9년에는 왕자를 보내 당에 조공하였고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정상적인 왕노릇을 하였으나.
10년에 지진, 홍수, 역병에, 왕비까지 죽는 불상사가 연이어 일어났다.
12년에는 새 출발을 결심했는지, 신궁에 제사를 지냈는데,
지진에 기아에….각지에 사자를 파견하고 구휼미를 풀어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14년에 정부 조직을 개편하고 당과의 교류를 예전처럼 활성화시키는 등 분위기 쇄신을 해보려 했으나,
귀족들은 여전하여, 이찬 근종이 궁궐까지 쳐들어왔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근위병으로 반란군을 때려잡고 근종을 거열형에 처했다.
이 해에 최치원이 당에서 급제했다.
15년차인 875년 혜성이 나타나고, 용이 출몰하더니 왕이 죽었다.
향년 30세 ( 또는 34세). 근친결혼의 부작용인지 아니면 다들 암살을 당하는 것인지,
중대 이후 신라왕들의 명이 왜 이리 짧은지 알 수가 없다.
자연재해와 반란이 연속되어 마치 문성왕기를 보는 것 같으나,
다른 점은 반란을 일망타진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외교도 활성화 되어 당과의 교류가 이전 전성기 시절처럼 왕성하였고,
일본과도 교류도 재개된 듯하다. 강해진 왕권을 시사한다 하겠다.
이 양반은 설화가 많은데,
제일 유명한 것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의 귀` 설화일 것이다.
이 설화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러가지 버전이 있는데,
기본 플롯은 동일하고 결말 부분에서만 차이가 난다.
다른 나라에서는 임금이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으나 경문왕은 근심하다 죽는데,
이 설화를 왕이 뱀과 함께 잔다는 이야기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경문왕이 주변을 친위 세력에 둘러 싸고 골품 귀족들과 대립하였으므로,
귀족들이, 반감 내지는 비아냥을 이야기에 담아 그러한 결말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각각 순서대로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이 되었다.
그리고 장보고의 딸과 통정하여 궁예를 낳았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장보고는 죽고 난 다음에 외척의 꿈을 이룬 셈이나,
궁예의 출신이 워낙 불확실하여 완전히 믿기는 힘들다.
어쨌든 경문왕 치세 동안 궁예가 태어난 것은 확실한 것 같고, 견훤도 이 시기에 태어났다고 하니, 후삼국 시대가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