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대 진덕여왕
이름은 승만, 국반 갈문왕의 딸로서 선덕여왕과는 사촌지간이다.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총명하였다고 한다.
비담의 난이 진행되는 와중에 사망한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화백회의도 거치지 않고 647년에 즉위하였는데,
즉위 후 불과 9일 만에 김유신이 비담의 난을 진압해준 덕분에 왕좌를 지킬 수 있었다.
알천을 상대등으로 삼아 대리 청정하게 하였으며,
신라의 정정 불안을 틈탄 백제의 공격을 막았고, 이어 신궁에 제사지내었다.
이듬해에도 이어진 백제의 공격을 막아 내긴 하였으나, 이러다 죽겠다 싶었는지,
김춘추를 당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김춘추는 내시 노릇을 자청하며 구걸외교의 진수를 보여주었고,
당태종 이세민이는 고구려에 한 번 혼쭐이 난 후라 그랬는지,
선덕여왕 때와는 다르게 신라를 후대하였고 동맹도 맺어주었다.
이에 고무된 김춘추는 귀국 후 한화정책을 주도하여,
군제, 제도, 관료의 복식 등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김춘추, 김유신 일파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나,
고구려, 백제는 이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 오히려 공격을 더 심하게 하였고,
3년차에는 백제에게 7개 성을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즉위한지 단 3년 만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믿을 건 당 밖에 없었으므로,
치당태평송을 지어 바치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더욱 당에 매달렸다.
5년에는 품주를 집사부로 바꾸어 기밀 사무를 취급하게 하는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였으며,
대당 종속, 굴욕 외교를 지속하였다.
8년간 재위하였다.
국반의 딸이므로 성골이라고 우겨 볼 수는 있으나,
진평왕의 자식이 아니므로 오리지날 성골은 아니고,
여왕의 무능은 선덕여왕 때에 신물나게 겪었으므로 여인의 능력을 기대해서도 아니고,
화백회의를 거치지 않았으니 정통성에도 핸디캡이 있었고,
도대체 왕이 될 만한 조건이라고는 하나도 갖추지 못한 여인이었다.
왕으로서의 자격도 명분도 없었으므로,
임명권자나 다름없는 김춘추, 김유신 일파의 바지사장 또는 얼굴마담 역할에 충실하였을 것이다.
재위 기간의 업적이라고는 대당 외교가 거의 전부인데, 그 외교라는 것이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직접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직접 비단에 수를 놓아 이세민이에게 바쳤다는 태평송을 읽어보면 마치 당 황제의 현지처 내지 승은을 입은 시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는 신라가 왕의 여성성까지 이용해야 할 정도로 절박했었다는 의미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야심가 김춘추 입장에서는 참으로 편리한 방패막이였고, 쓸 만한 도구였을 것이다.
이쁘고, 말 잘 듣고, 거기에 살 날 얼마 안 남은 마지막 고귀한 여인,
김춘추 생애 최고의 파트너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