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대 무령왕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무령왕릉 덕분에 백제의 왕들 중 가장 유명한 양반이다.
출생에 대해서는 불륜의 씨앗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정황상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 맞는 것 같다.
일본에서 태어났고, 동성왕이 시해되자 왕위에 올랐다.
동성왕 반대파에 의해 왕위에 추대 되었으나, 반정공신이라 할 수 있는 백가를 토벌하고 귀족세력을 억눌렀다.
동성왕이 말년에 향락에 빠져 포학무도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국력을 회복시키고 왕권을 강화해준 덕에 왕노릇을 제대로 할 수 았었을 것이다.
22개 담로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 중앙집권적 정치안정을 이루었고,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 구세력을 통제하였다.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제방을 구축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등 민생안정에도 힘썼으며,
중국 양나라와 외교 관계를 강화했고, 일본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다.
즉위 첫 해부터 문자명왕의 고구려를 공격했고, 말갈족과도 여러 번 싸웠다.
말갈족, 한 동안 찍소리 없더니 동성왕 때부터 또 난리를 치는데, 무슨 일일까?
고구려는 한강유역에서 백제를 쫒아 내었지만 완전하게 장악하지는 못했는데,
백제의 빈자리를 원주민격인 말갈족이 다시 채웠거나, 아니면 백제에 복속했던 말갈이 주인을 바꾸어 이번에는 고구려에 복속했던 것은 아닐까?
백제가 다시 한강으로 진출하자 말갈은 겨우 되찾은 서식지를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무령왕은 말갈과 싸워 한강 유역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남쪽으로도 진출하여 침미다례국을 완전히 병합하며 마한세력을 일소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는 등, 장악력을 높였다.
덕분에 한때 신라에 맞먹을 만큼 팽창했던 대가야가 몰락하였다.
웅진 시대 왕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왕으로,
62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약 23년간 재위하며 백제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키가 8척에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망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명군이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려주는 최초의 무덤인데, 박정희 시절 마치 도굴하듯이 발굴하여 말이 많았다.
금제관식, 금제심엽형이식(귀걸이), 금제뒤꽂이, 은제팔찌, 청동신수경, 석수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에 달하는 부장품들이 출토되었다.
신비의 왕국, 백제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풀어준 왕릉이다.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