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는 흥안, 문자명왕의 아들로 519년 왕위에 올라 중국의 남북 양조 모두와 교류하였다.
재위 5년에 백제를 공격하였고,
재위 11년 오곡에서 백제를 크게 이겼다. 포로는 2000.
재위 13년째에 서거하였다.
기록을 요약하면 이렇게 빈약하여, 고구려 쇠퇴기의 시작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으나,
요서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북위의 용성을 약탈하였고,
백제와 빈번한 전쟁을 벌여 한강 유역을 확보하는 등, 문자명왕 보다 더 공격적이었고 실적도 좋았다.
멀리있는 남조뿐만 아니라, 수시로 변경을 약탈당하던 북위도
고구려를 높이 평가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고 하니,
당시의 위상이 녹녹치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전성기는 안장왕까지 연장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
전해 오는 일화에 따르면,
태자 시절, 한성 부근에서 첩보 활동을 하다가 한주라는 미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는데,
귀국하여 고구려에 있는 동안,
그녀의 미모에 홀린 고을 태수가 첩으로 삼으려 했고, 거부하자 죽이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듣자 부하 장수를 파견해,
잔칫날에 태수를 참살하고 이 의리 있는 미녀를 구하였으며,
뒤이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춘향전과 거의 같은 스토리이다.
또한 단심가는 한주가 태수의 협박과 유혹을 거절하면서 쓴 시를 정몽주가 차용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이 분의 능력과 로맨틱한 면이 부각되는 일화라 하겠다.
안장왕의 죽음이 암살이고 아들인 복귀군은 일본으로 망명해 코마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로맨티스트 안장왕이 후사를 못 남겨, 동생이 뒤를 이었다는 것이 좀 어색하여 그럴 것 같기도 하지만,
워낙에 신뢰도가 바닥인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왜놈들 창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