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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설/칼럼고구려 : 17대 소수림왕, 명군 중의 명군

고구려 : 17대 소수림왕, 명군 중의 명군

함자는 구부.
371년, 화살에 맞은 상처가 덧나 사망한 고국원왕의 뒤를 이었는데,
왕이 무력화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결사 항전한 군민들 덕분에 평양성은 지켜내었으나,
이미 아버지가 생전에 남북으로 온갖 망신을 떨며 나라를 알뜰하게 거덜내었기에,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의 동네 국가 수준으로 전락하였으며, 왕실의 권위는 바닥이었다.
이러한 암담한 상황에서 탈출로를 모색하던 소수림왕은,
이듬해에 태학을 세우는 한편 불교를 공인 하였다.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태학은 물론이고, 왕즉불 사상의 불교 또한 왕권 강화에 기여하여,
국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으므로,
절박한 처지의 고구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전진의 승려 순도에 의해 처음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해동고승전 등을 보면 민간에는 이미 한참 전에 퍼져 있었으므로,
국가의 위기를 맞아, 왕실 차원에서 정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처음이라는 뜻일 것이다.
373년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고,
다음 해에 아도 화상이 들어오자, 불교를 호국사상으로 삼아 사찰을 세우는 등 적극적으로 포교하였다

재위 5년째인 375년, 백제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여 빼앗겼던 수곡성을 되찾았고, 백제의 변경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377년, 거듭되는 변경 침략에 열 받은 백제 근구수왕이 직접 3만 군사를 동원하여 평양성으로 쳐들어왔으나, 달라진 고구려는 이들을 큰 손실 없이 격퇴하였고,
그 해 11월에는 보복전을 펼쳐 남쪽을 정벌하였다.
378년 큰 가뭄이 들어 곤경에 빠졌는데, 거란까지 침입하여 약간의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384년 후사없이 서거하여 소수림에 묻혔다.
14년 1개월간의 재위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매우 뛰어났으며,
태자 시절부터 국정에 참여하고 군대를 지휘한 멋진 왕자님이었다.
불교를 공인하고, 태학을 세우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의 내치의 업적에 비해,
외정의 화려함은 다소 부족하지만,
단 5년 만에, 망할 지경의 국가를 정비하여,
근초고왕이라는 당대의 명군을 상대로 보복을 하고 영토를 회복하였다.
경이로운 능력이었다.

우리 역사상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나라를 중흥으로 이끈 임금들로는,
백제의 고이왕, 산라의 법흥왕, 통일신라의 신문왕, 고려의 광종, 조선의 세종대왕 등이 있으나,
이 분들은 나라가 망조가 든 상태에서 치세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에 성공하여, 거덜난 나라를 재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전성기로 진입시킨 능력은 고려의 현종에 비견할 수 있고,
정비한 제도의 양과 질을 비교하면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소수림왕은,
광개토대왕을 위해 준비된 인물 따위가 아니라,
위대한 고구려를 가능케 한 진정 위대한 개혁군주라고 할 것이다.

이 분의 또 다른 시호로는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해미류왕(解味留王) 등이 있어,
해씨 고구려설의 신봉자들을 멘붕에 빠뜨리기도 하는데,
입증 불가능한 고대 왕의 계보에 머리를 썪히기 보다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소수림왕을, 대해주류왕이라고 불렸던 대무신왕의 계보를 잇는 뛰어난 정복군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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