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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年 11 月 22日 4:32 下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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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설/칼럼고구려: 2대 유리명왕, 한국판 테세우스

고구려: 2대 유리명왕, 한국판 테세우스

부러진 칼을 신표 삼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가는 한국판 테세우스.
사랑을 잃고 황조가를 읊조리는 낭만주의자.
겁 많은 큰 아들은 병으로 잃고, 과격한 둘째 아들은 자살하게 하고, 총애하던 넷째는 물에 빠져 죽어, 여섯 아들 중 반을 가슴에 묻는 실존적 고뇌를 많이도 겪은 아버지.
참으로 에피소드가 풍부한 양반인데,
이 분은 추모 대왕이 동부여에서 사고치고 다닐 때 만든 자식으로 아버지 없이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가 미운 오리새끼였는데 아들이 백조대접을 받았을 리는 없으므로,
생과부가 된 어머니 예씨 부인과 어렵게 살았을 것이나,
그래도 유리걸식하며 떠돌지 않고 씩씩하게 자란 것을 보면, 이쁜 할머니 유화의 도움이 컷었나 보다.

기원전 24년 유화부인이 죽고 그녀의 흑기사 금와왕도 따라 죽는 바람에 살기가 힘들어졌는지,
아니면 새로 왕이 된 대소와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리는 기원전 19년,
어머니를 모시고 장도에 올라 그 동안 소식한 줄 없는 졸본의 잘난 아버지를 찾아갔고,
아버지로 추정되는 아저씨에게 일곱 모난 돌 위 & 소나무 아래, 즉 주춧돌 위 소나무 기둥 구멍에서 찾아낸 칼 조각을 내밀자,
고구려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던 이 아저씨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칼과 맞춰 보았는데,
그러자 희안하게도 칼에 피가 통하면서 서로 이어졌다고 한다.
어머니도 동반했겠다 이 정도면 아들로 인정받을 만한데, 이 부자에게는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
유리는 햇빛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해모수급의 재주까지 보여주고 나서야, 아들로 인정받고 태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급의 능력이 없으면 아들이 아닌가?
그리고 아들이 이렇게 난이도 높은 시험을 2차까지 치는 동안 예씨 부인은 뭐하고 있었을까?
그 동안 너무 늙어 서로 못 알아본 것은 아닐테고.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이 허황된 이야기는 당시 상황의 은유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유리가 등장한 후 발생한 소서노 모자의 탈출이라든가, 동명성왕의 때 이른 죽음 등의 정세 변화들을 고려하면, 고구려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유리가 동명성왕을 찾아갈 때 하필 칼 조각을 가지고 갔다는 것은 일종의 무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달랑 모자만 찾아간 게 아니라 동반한 세력이 있었다는 의미일 수 있고,
동명성왕이 보관하고 있던 칼 조각과 아귀가 맞았고 피까지 통했다는 것은,
오이, 마리, 협부, 등으로 상징 되는 선 이주 동부여 세력의 일부와 유리 동반 세력의 제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햇빛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신술은 무력의 우위 또는 기선 제압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추정이 맞는다면,
소서노 모자는 예전에 추모나 유리가 동부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력에서 밀려 졸본을 탈출한 것이고,
유리의 등장 이후 5개월 만에 40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동명성왕 또한 자연사가 아닐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고구려와 동부여의 관계가 악화된 이유도 유리 세력의 탈출 때문이라는 추정도 가능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항상 안개 저편에 있으므로 알 길은 없다.

왕위에 오른 유리왕은 기원전 18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바로 죽었고,
이듬해에 그 유명한 화희와 치희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황조가를 지었다.
기원전 9년에는 선비족을 토벌하였고.
기원전 6년, 동부여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았으나 폭설 덕분에 물리칠 수 있었다.
서기 3년에는 오녀산성을 떠나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개국 공신 협보를 좌천시켰다. 
계루부의 본거지에서 왕 노릇하기 불편하였나 보다.
서기 4년, 죽은 첫째를 대신해 둘째 해명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서기 8년, 황룡국왕이 해명의 힘을 시험해보려고 강한 활을 선물하였는데,
해명이 힘자랑을 하며 활을 꺾어버려, 황룡국왕을 부끄럽게 하는 바람에, 유리왕이 노하여 해명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열받은 해명은 땅에 창을 거꾸로 꽂아 놓고, 달리는 말 위에서 창날에 몸을 던지는 초원 용사의 방법으로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뭔 소리일까?
유리왕은 왜 국위를 선양한 자식에게 자결을 명할 정도로 노하였고,
애비가 그런다고 해명은 왜 그렇게 살벌한 방법으로 자살했을까? 황룡국은 웬 듣보잡 국가고?
도대체가 이해 안가는 일들 투성인데, 알 수가 없다.
서기 9년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부여를 섬길 것을 종용하였으나,
왕자 무휼이 반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유리왕의 자식들은 참 말을 안 듣는다.
서기 12년, 신나라의 왕망과 툭탁거렸고
서기 13년, 부여의 침공을 무휼이 격파하였다.
서기 14년, 양맥을 정복하고 현도군의 고구려 현을 빼앗았고,
서기 18년에 서거하였다.

유리왕은 등장부터 범상치가 않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생을 살다 간 사람으로,
계루부의 본거지인 오녀 산성을 떠나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해씨를 성으로 쓰는 등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추모대왕의 자식이 아니라 소노부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해씨 고구려 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당시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훨씬 지난 지금,
관련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실체적 진실을 알기는 어렵다.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고구려의 임금이었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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