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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年 11 月 23日 12:59 下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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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설/칼럼태봉 : 궁예(2), 난세의 화려한 불꽃

태봉 : 궁예(2), 난세의 화려한 불꽃

민초들이 편한 시대는 별로 없지만, 난세는 민초들을 더욱 힘들게 하여,
자신과 가족을 지킬 힘이 부족한 이들은 도둑에게 빼앗기고, 다시 도둑이 되어 빼앗았다.
그 과정이 수월할 리는 없고, 결국 굶어죽거나 칼 맞아 죽는 것이 대다수 민초들의 운명이었는데,
이러한 막장의 삶을 사는 민초들에게, 전직 스님 출신의 무예가 출중한 애꾸눈 장군은 신비감을 자극하였을 것이고, 의지와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궁예는 거지 떼와 다름없는 도적 병사들을 이끌고 정벌을 빙자한 약탈에 나서면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한 듯하다.

궁예는 명주성을 접수하면서 힘을 얻었는데,
지역의 강자이자 진골귀족인 성주 김순식은 왜 이 볼품없는 거지왕초에게 성을 내어 준 것일까?
중앙에서 밀려난 진골 귀족으로서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불우한 왕족을 후원하던 관계의 연장선상일 수도 있고.
망할 것이 확실한 신라를 위해, 광신적인 종교집단과 피를 흘려가며 싸워봐야 득될 게 없다는 냉철한 난세의 계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가 뭐였든 궁예는 김순식과 동맹을 맺은 듯하며, 이 동맹을 계기로 궁예는 필요한 힘을 얻어 장군을 자칭하게 되었다.
두목은 그냥 도둑놈인데 부하가 진골들만 할 수 있는 장군이면 족보가 이상하게 꼬이게 되므로,
이는 결국 궁예가 ‘나 이제 독립하겠소.’ 하고 양길에게 선언하는 의미였고,
제법 배포는 컸으나 시대의 소명의식 같은 고상한 이념과는 인연이 없었던 양길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양길의 심리상태에 관계없이 힘과 명분을 확보한 궁예는 왕건을 거두면서 날개를 달게 되었다.

송악(개성)에 기반을 둔 해상 호족인 왕건은,
통일 신라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반 독립적이었던 패서계 즉 고구려계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장보고의 몰락 후 벽골군으로 이동했던 청해진 세력의 일부와도 맥이 닿는 당대의 강자였다.
거지 왕초에 불과했던 궁예가 김 순식에 이어 왕건까지 수하에 거두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긴 하지만, 이는 역으로 그의 능력이나 비전이 대단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궁예의 탁월한 군사적 식견을 보여주는 것은 나주점령인데.
나주지역은 옛 백제 땅이기는 했으나, 가장 늦게 백제에 편입된 지역으로, 근초고왕시기까지 백제에 적대적인 침미다례국으로 존속하였다.
이들은 남만이라고 불렸으며,
삼국형성 이전부터 중국, 일본과의 교역에 종사하였고, 해적질에도 능한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이들과의 제휴가 있었기에 장보고가 신라 조정의 지원 없이도 청해진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뭐가 되었건 이 동네에서 성공하려면 일단 호족들과 잘 지내야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들과 견훤은 갈등하였던 듯하고,
견훤이 강제로 복속을 시키자, 일단 복종은 하였으나 뭔가 불만이 많았던 듯하다.
이러한 현지 사정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궁예는 나주공략을 지시하였고,
왕건은 자신의 뛰어난 해전 능력에 더해,
또 다른 해양세력이기도 한 나주 호족들의 적극적인 협력에 힘입어 후백제 후방 깊숙이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로써 궁예는 견훤의 인후에 비수를 들이댄 꼴이 되었고,
견훤을 압도하며 평안남도, 경기도 , 강원도, 충청도, 경상북도 일부 그리고 나주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천하가 눈앞에 있었다.

궁예는 정복전쟁 과정 중에 부석사에 들를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로 추정되는 경문왕의 영정을 발견하였고 칼로 베어버렸다 한다.
이러한 과격한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우선은 자신의 뿌리이기도 한 신라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일 것이고,
두 번째는 효성과 같은 기존 가치관에 대한 부정일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결국은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 및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궁예는 광신적인 자신의 친위세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궁예의 성공에 기반이 되어준 세력은 불교의 미륵종파와 호족들이었는데,
이들은 과거의 강자 골품귀족을 밀어내고 현세의 강자로 군림한 당대의 주류였다.
궁예의 전쟁은 주류의 교체라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진행되었으므로, 궁예의 성공은 곧 이들 신주류의 성공을 의미하였는데,
이렇게 구축된 새로운 질서는 궁예의 소명의식과는 맞지 않았고, 궁예가 원하는 질서 또한 아니었던 모양이다.
궁예는 만민 평등, 영세 평화의 미륵정토를 꿈꾼 듯한데, 이 몽상적인 이상주의는 당연히 반발을 불렀고 저항에 부딪혔다.
궁예의 밑천이랄 수 있는 미륵 종파에서부터 시작된 저항은, 정복 전쟁에서 가장 공이 크고 세력이 강한 패서계 호족들로 퍼져 나갔으므로,
내편이 되어 주어야할 자들의 반발은 궁예의 기반을 흔들었고, 또 분노하게 하였다.
불안을 동반한 분노는 폭주를 불렀고 이들에 대한 잔인한 탄압으로 이어졌는데,
이러한 전혀 미륵답지 않은 궁예의 행동들은 주위의 신망을 잃게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버렸다.
중을 때려죽이고 마누라의 음부를 찔러 죽이는 미륵이나 보살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또한 기왕 미륵의 탈을 벗고 야차가 되었으면 끝까지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패서계의 수장인 왕건을 죽이지 않고 좌천시키며 타협한 것도 문제였다.
어정쩡한 공포 따위로, 난세를 살아온 자들에게 완전한 복종을 끌어낼 수는 없었고…
고사되기를 거부한 패서계 호족들의 한밤중의 쿠데타로, 한 순간에 다 잡은 천하를 날려버렸다.

궁예의 죽음 또한 논란이 많은데,
변장을 하고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날로 먹던 중,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맞아죽었다는,
전혀 영웅답지 못한 최후설이 정설로 되어 있으나.
궁예가 자살했다는 자살 바위, 한탄하며 강을 건넜다는 한탄강,
군대를 이끌고 산에 은거해서 왕건과 싸울 때,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길 안내까지 해줬다는 설 등 영웅적인 최후를 암시하는 전설들도 많다.
자칭 미륵이었던 궁예를 진짜 미륵으로 모시는 마을들도 있었고.
이를 궁예미륵이라 한다.
궁예 사후, 청주에서 잇달아 반 왕건 반란이 일어났고,
명주의 김순식은 4년이 넘도록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았으며,
공주지역도 여러 번의 반란 끝에 결국 후백제에 투항하였다는 등의 기록들은,
궁예의 새로운 질서가 광인의 미친 짓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예라 할 것이다.

기존의 권위가 무너져, 폭력적인 힘이 정의가 되고 진리가 되는 난세.
그 난세의 바람을 타고 화려한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스러져간 궁예.
비록 비현실적인 신정주의 국가를 꿈꾸기는 하였으나,
만민평등, 영세평화라는 인류의 영원한 꿈을 현실에서 이루고자 했던 진정한 난세의 영웅이자,
난세의 화려한 불꽃이었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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