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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年 11 月 23日 12:14 上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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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설/칼럼백제 : 시조 온조왕

백제 : 시조 온조왕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추모(주몽)왕의 친아들인 지는 확실치 않다.
친아들이든 아니든, 어느 쪽으로도 첫째가 아니므로 왕위와는 좀 거리가 있는 신분이었으나,
복잡하고 사연이 많은 과정 끝에, 어머니 소서노가 일족과 더불어 남하하였고,
일행이 서식지 문제로 분란이 생겨, 형 비류가 교역파와 더불어 미추홀로 떠나는 바람에,
하남시 잔류파를 거느리고 어머니와 함께 나라를 세워, 졸지에 왕이 되었다.
처음엔 신하가 10명이라 십제라 하였으나 이후 세력을 키워 백제라 하였다는데,
참으로 상상력이 부족한 작명이라 아니할 수 없으나,
얼마나 귀족 세력들의 힘이 컸으면 나라 이름을 귀족들 숫자로 하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백제가 자리 잡은 곳은 말갈의 땅이었으므로 당연히 백성은 말갈족이었을 것이고,
말갈족은 퉁구스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 하니 언어도 달랐을 것이다.
연고도 없는 외지인 집단을 환영하고 순순히 지배를 받아들이는 순한 양 같은 종족은 없으므로 정복이 필요했을 것인데,
말갈이라고 해서 만민 평등의 이상사회는 아니었을 테고,
피지배계층은 싸워봐야 별 이득도 없이, 괜한 생목숨만 날리는 꼴이 되기 십상이었을 것이니,
눈치나 보고 있었거나 아니면 어디 짱박혀서 구경하고 있었을 공산이 크다.
따라서 칼 든 놈들만 쫓아내면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숨어 있다 돌아온 놈들이나 처음부터 저항하지 않았던 놈들은 그냥 백성으로 삼아 세금이나 걷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결국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이민족이 원주민을 통치하는 식민지 지배 구조가 백제의 시작이었기에,
이러한 태생적 한계가 귀족의 힘이 강하고 백성은 정치에 무관심하며,
중앙 세력들은 끊임없이 권력투쟁에 몰두하고, 지방 세력들은 나라가 망하든 말든 자기 나와바리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백제의 고질적인 병폐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온조가 자리를 잡았을 당시, 북쪽으로는 평양에 근거를 둔 낙랑국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춘천에 근거를 둔 말갈족 국가인 맥국, 남쪽으로는 마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초창기에는 주변 제 세력들에게 저자세를 취했을 것이므로,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묵인을 받을 수는 있었을 것이나,
백제의 세력이 커져감에 따라 점차 갈등 관계로 변하게 되었을 것인데,
온조의 능력이 출중하였던지, 아니면 살기 위해 귀족들이 너 나 없이 뭉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백제는 맥국을 동쪽으로 밀어내고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즉위 후 제일 먼저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는 것으로 보아,
온조왕은 추모(주몽)대왕의 자식이 맞기는 한 것 같은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다음부터는 주변국들과의 싸움으로 점철된다.
말갈과 싸우고, 말갈과 연합한 낙랑 또는 동예와 싸우고, 공격을 받고 보복 공격을 하고 등등.
재위 11년 낙랑의 부탁을 받고 말갈이 공격을 해왔다는 것으로 보아,
이즈음엔 낙랑과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고, 말갈이 낙랑의 용병 노릇을 한 게 아닌가 싶다.
낙랑이 아니라 동예라는 설도 있다.
13년에 여걸 소서노가 졸하였는데,
이해에 도읍을 옮겼다는 것으로 보아 권력이 제법 확고해진 듯하다.
온조왕의 권력이야 어찌되었든 주변 제 세력과의 갈등은 계속되어,
말갈, 동예 또는 낙랑의 침입을 받고, 격퇴하고 등등, 사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24년에는 남쪽에 목책을 세웠으나 마한의 항의를 받아 철거하였고,
26년에 마한을 기습하여 병합했다고 하는데, 믿기는 어렵다.

백제와 마한과의 관계는 개국 이래 종주국과 번국의 관계로서,
백제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낙랑, 동예와는 적대 관계가 되었으나 마한에게만은 신속하였는데,
힘이 갑자기 커진 것도 아니고, 주변국들과 우호를 회복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쿠데타를 일으켜 두목을 때려잡고 두목의 나와바리를 삼켰다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아마도 시조왕을 신격화하기 위해 후대의 업적을 끌어온 조작일 것이다.
온조왕은 재위기간 내내 말갈, 낙랑, 동예와 싸우고, 대책을 수립하고, 마한에 아부하고 등등,
살기 위해 몸부림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도 장수하여 무려 46년간 재위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믿기는 어렵다.

기록 미비와 후대의 조작 등으로 인하여, 삼국 초기 왕들의 기록은 모순이 많다.
감안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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