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겪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고구려의 왕 노릇하느라 전전긍긍했던 양원왕의 맏아들로서,
출생년도는 모르나, 양원왕이 요절한 듯하니 아마도 10대에 아버지의 뒤를 이었을 것이다.
휘는 양성, 559년 왕위에 올라,
농상을 장려했으며, 먹는 음식을 줄이고 선대부터 축조하던 장안성 공사를 일시 중단하기도 하는 등
근검절약하며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고.
고구려를 거덜 낸 귀족들 싸움에 넌더리가 났는지 평민 출신의 사위를 맞이하였다.
사위 온달은 바보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야전에 능한 훌륭한 장수로서,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와 배산의 들판(현재의 내몽골 지역)에서 싸워 승리하였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신라를 막아내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 기특한 사위의 지원 덕분에,
평원왕은 어진 정사를 펼쳐 민심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북주는 쿠데타로 망하고 수나라가 되었는데,
초대 황제 수문제는 근근히 유지하던 남조의 숨통을 끊어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내치로,
후한 말기 이래 400여 년을 지속한 중원의 혼란을 종식시킨 영명한 군주였다.
대륙의 강력한 통일 왕조의 출현은 고구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에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고,
고구려에 복속했던 거란의 일부가 수나라에 투항하는 등, 정세가 불안해지자,
신라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고,
수와의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장안성으로 궁성을 옮겼다.
수습된 민심 및 회복된 국력과 더불어 이러한 대비는,
대륙의 계속 되는 침략에 저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일찌감치 실증한 분으로,
딸자식의 땡깡에 속수무책인 평범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나,
평민 출신을 중용하여,
제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던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국력을 결집시켰으며,
같은 평양에 위치하더라도, 전시용과 평시용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기존의 궁성에서,
보다 기능적인 장안성으로 이주하고 국정을 다잡아, 민심을 다독였고 나라를 중흥시켰다.
비록 걸출한 정복군주 진흥왕에게 한강 유역은 물론 함경도의 일부까지 빼앗기는 치욕을
맛보기는 했으나,
통일된 대륙의 무서운 힘을 감지하고 나라를 안정시켜 후대의 위협에 대비한 업적은
충분히 평가받을만 하다.
평원왕이 고구려를 중흥시키지 않았다면,
수, 당의 침입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32년간 재위하며, 진흥왕과 수문제라는 당대의 영웅 둘을 상대하면서도,
고국천왕의 재림처럼, 선정으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던 고구려를 동북아의 강자로 되돌린 평원왕,
명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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