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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年 11 月 22日 10:21 上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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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설/칼럼고구려 : 4대 민중왕, 진통의 시대

고구려 : 4대 민중왕, 진통의 시대

시호만 보면 민주 투사 출신 같지만, 그 정도의 인물도 그럴만한 시대도 아니었다. 한자도 다르다.
고구려 왕들은 대부분 능침이 자리 잡은 지역의 명칭을 차용한 일종의 묘호를 시호로 사용한다.
좀 성의가 없긴 하나 그래도 중국 놈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조, 종보다는 나름 정감이 있다.

해색주.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유리왕의 넷째 또는 다섯째 아들이라고 하므로, 왕위와는 거의 인연이 없는 서열이었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후한 광무제에게 패전한 후 급사하자,
유력한 후계자였던 호동왕자는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이유로 오래 전에 자살하였고, 
태자 또한 국사를 돌보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얼핏 보면 국가의 위기를 모른 척할 수 없어 대신 무거운 짐을 짊어진 갸륵한 숙부 같지만,
역사 상 대부분의 경우처럼 그냥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을 것이다.

5년간 재위하였는데 업적은 별로 없으나 좀 특이한 기록이 있다.
재위 4년째에 사냥을 나가, 민중원에서 석굴을 발견하고 그 곳을 자신의 장지로 정했는데,
그 해 말에 대승이 일만여 호의 백성과 함께 낙랑군으로 가버렸고,
왕은 이듬해에 사망했다고 한다.
기록도 짧고 내용도 별 것이 없으나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팔팔한 나이에 사냥을 하다가 하필 석굴을 자기 무덤으로 정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봐도 이상하고,
그 후 상당한 인구가 적국으로 탈출하였으며 이어 왕이 바로 죽었다는 것 또한 너무 부자연스럽다.

석연치 않은 즉위와 여러 자연재해 기록 등으로 보아, 옥좌가 편안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고,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해 했을 조카가 뒤를 이었으니, 뭔가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므로,
멋대로 상상을 해본다면,
민중왕은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 반대파에 의해 석굴에 감금되었으며, 
민중왕 지지파들은 예전의 소서노처럼 고구려를 떠났고, 왕은 결국 제거되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진실은 항상 안개 저 편에 있다.

이름이 해색주라는 것 또한 걸리는 부분이다.
모두 이름이고 성이 고씨일 수도 있지만 해씨라면?
민중왕이 해씨면 대무신왕, 유리왕, 그리고 다음 대 모본왕도 모두 해씨가 되는데 동명성왕은 고씨이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로 시작하였으므로, 초창기에는 하나하나가 모두 부족 국가였다.
그 중 비류국이 속해 있던 소노부가 최대 세력이었고 부족 연맹체 형성을 주도하였는데,
계루부가 동명성왕과 손잡고 주도권을 빼앗었다고 추정해 본다면,
동명성왕 2년, 비류국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사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후 소노부가 유리왕과 손잡고 다시 주도권을 탈환했다면,
정벌 당했던 비류국 송양의 딸들이 연속해서 왕비가 된 것도 이해가 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계루부 소서노 세력의 이탈도 설명이 가능해 진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동화처럼 상봉한 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은 부자지간이 아니라, 성까지 다른 생판 남이 되어버린다.
이를 해씨 고구려 설, 또는 유리 쿠데타설이라고 한다.

이 또한 꿰어 맞추기에 불과한 추정일 뿐 입증된 것은 하나도 없으므로 다르게 생각해보면,
해모수는 두목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두목 급들은 초창기에는 해씨를 사용하지만,
왕권이 강화되면서 특별한 왕성을 만들어 쓰게 되는 것이 고대의 관행이었을 수 있다.
백제의 왕성이 처음에는 해씨였다가 나중에 부여씨로 바뀌게 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일 것이고.
따라서 이것저것 골치가 아프면 그냥 해씨가 곧 고씨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뭐가 되었건 상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 고대사를 공부하는 재미일 것이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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